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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 버스, 그리고 일탈 >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는 고속도로를 달려가고 있다.
물론 당신이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모른다면 '그게 뭐가 이상해?'라고 되묻겠지만.
우린 지금 마을버스를 타고 있단 말이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그날도 나는 어김없이 마을버스에 올랐다.
언제나처럼 정시에 출발하고, 정해진 길로만 다니는 마을버스의,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버스 기사의 언제나처럼 재미없는 인사를 받으면서 말이다.
적어도 '그녀'가 타기 전까지는 모든 것들이 그 '언제나처럼'이었다.
평일의 늦은 오후였기에 버스에 탄 승객은 그녀와 나 둘 뿐이었다.
한 가지 조금 걸리는 점이라면 그녀는 교복을 입고 있다는 것.
지금은 한창 수업을 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지금 버스를 탔을까.
평소 친구놈이 지적하던 그 '넓은 오지랖'이 빠른 속도로 앞자리에 앉은 그녀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가능성은 두 가지.
무지무지 늦게 일어나서 지금 막 등교를 시작하거나,
오늘은 그녀의 고등학교가 개교 기념일이거나.
역시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두 번째가 더 맞지 않을까.
내 머리는 그걸로 그녀에 대한 '탐색'을 마치곤 곧 그녀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렸다.
어젯밤 늦게까지 본 영화 생각을 하다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마을버스는 막 톨게이트를 통과하고 있었다.
어, 톨게이트?
언제 새로운 노선이 생겼지?
어리둥절하고 있는 그때, 마을버스는 속력을 높이고 있었다.
버스를 잘못 탔나?
언제나처럼 타던 버스다. 노선이 헷갈리거나 번호를 헷갈렸을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버스석에 앉아 있어야 할 기사 대신 아까 그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아, 그래서 그렇구나. 역시 그 정확한 기사 아저씨라면 실수 할 리가 없..
잠깐만.. 왜 네가 거기 앉아 있는거야?
그보다도 고등학생이 면허가 있을리가 없잖아?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어찌해야 한다?
"저기.."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물어본다.
"지금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거지?"
그녀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나를 돌아볼 틈도 없이 당차게 외친다.
"바다요."
이제 다들 상황 파악이 좀 됐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두통의 한 10% 정도를 공감하고 있는 셈이다.
당신과 공감대가 생겨서 기쁘다.
물론 이런 상황만 아니라면 정말 기쁠텐데 말이다.
일단 침착해야지.
운전석과 가장 가까운 좌석이 앉았다.
버스를 둘러보니 승객은 그녀와 나 둘 뿐이다.
"중얼중얼"
"저기.. 운전 중에 자꾸 말 시켜서 미안한데"
가만, 내가 미안할 게 있나?
"중얼중얼.. 왼발은 악셀.. 오른발은 브레이크.. 왼발은.."
"저기!"
"엑?"
그녀가 화들짝 놀란다.
"너 혹시 면허는 있는거냐?"
"그런거 없으니까 말 걸지마요. 아까도 왼발이랑 오른발이랑 헷갈려서 큰일 날 뻔 했으니까."
신이시여.
"그래도 걱정 마세요. 아까보다는 좀 익숙해져서 이젠 괜찮아요. 왼발이 브레이크고 오른발이 악셀이니까요!"
퍽이나.
사색이 된 내 얼굴을 보고 그녀가 중얼거린다.
"오른발이 브레이큰가? 역시.."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면허 딸걸.. 이제와 아무리 후회해봐도 의미가 없었다.
나는 뒷좌석에서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기도를 열심히 올리고, 그녀는 아까처럼 엑셀과 브레이크를 혼동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뇌고 있었다.
"오른발 브레이크.. 왼발 악셀.. 역시 왼 악, 오 브가 나으려나?"
누군가 보면 정말 웃긴 상황이겠지만, 내게는 그닥 유쾌하진 않은 오후다.
그러는 사이에 버스는 톨게이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버스는 이제 바다를 오른편에 두고서 달리기 시작한다.
창문으로 짭짤한 바다 내음이 섞인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상쾌한 바람이 오후의 이 황당한 일탈을 실감나게 해준다.
해변가에 버스를 대자마자 그녀는 해변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두 팔을 벌려 자신을 향해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들이마셨다.
나도 버스의 창문을 열어젖혀 바다 바람을 들이 마신다.
입에 담배 한 개피를 문다.
손은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알싸한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드넓게 펼쳐진 해원을 바라본다.
바다라, 얼마만에 와보는걸까.
일이다 뭐다, 참 많은것들이 바다로 향하는 나를 방해해왔다.
그런데 참 뜻밖에도 바다가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갈매기, 모래, 바다에서 보는 태양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리드미컬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내 마음을 잔잔하게 만드는 것 같다.
아직 피서철은 아닌지라, 해변에는 그녀와 나 둘 뿐이었다.
태양은 따스하고,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일상에 찌들어 있던 나를 씻어낸다.
마치 담배로 가득 찬 재떨이를 비우듯이.
버스에서 내려, 모래사장 위를 걷는다.
발에 밟히는 모래의 감촉이 부드럽다.
쟤는 혼자서도 참 잘 논다 싶었다.
해변가에서 뛰어놀거나, 모래성을 만들기도 하면서 그녀 스스로도 일상에서 벗어난 지금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멀거니 지켜보는 것도 별로 지겹지는 않다.
해가 어느덧 뉘였뉘였 저물어간다.
역시 바다에서 보는 석양은 도시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놀다가 지쳤는지 그녀는 어슬렁거리며, 내 옆에 다가와서 앉는다.
"꿈이었어요. 이렇게 바다에 와보는거"
'바다 처음 와보냐.'
뭐라 딴지를 걸고 싶었지만, 나도 지쳐서 그럴 기력은 없었다.
조용히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오늘 시험을 망쳤거든요. 그래서 갑자기 바다에 와보고 싶었달까? 헤헤.."
쑥쓰러운듯이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웃는다.
그런 '엄청난 짓'을 하고서도 참 천진난만하게도 웃는다 싶다.
'무면허 운전은 엄연한 범죄라구, 이 아가씨야.'
이렇게 쏘아주고 싶었지만, 넘실대는 바다를 황홀한 듯이 바라보는 그녀를 차마 방해할 수 없어 그만두었다.
석양을 받아 그녀의 머리가 붉게 빛난다.
타는듯한 그 빛깔이 싫지만은 않달까.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도 떠오른다만, 이건 범죄다.
나이를 대략 짐작해봐도 차이가 꽤 될거 같아, 말도 안 되는 그 감정을 지우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랄까. 근데 그녀가 얼굴을 이렇게 들이미는데, 피하기도 좀 뭐하지 않으려나하고,
머릿속에서는 역대 철학자들이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한 논박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그녀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에..."
심장이 뛰고있다. 여지껏 그 어떤 때보다 빠르게...
"에..."
그녀는 점점 내게로 다가온다. 그리곤...
"에.. 에취!"
정신이 들었을 때, 앞자리의 그녀는 이미 내리고 없었다.
오후의 버스는 역시나 한산하다.
창 밖에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처럼 그대로인 풍경이다.
또한 운전석에 앉아있는 무뚝뚝한 운전기사도 언제나처럼 그대로랄까.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적거린다.
오후의 짧은 일탈을 아쉬워하듯, 창 밖 빌딩 위의 광고판에 그려진 푸른 바다를 멍하니 바라본다.
바다라..
버스는 언제나처럼의 노선을 달리기 시작하고,
나는 이내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The End
△ [Nec] 님이 그려주신 일러스트.
웃 넥서스님의 글이네요~ 재밋게 잘읽겠습니다~!!